🔍 사건 개요
**을사조약(乙巳條約, 1905년)**은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간에 체결된 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이 외교를 대행하도록 한 불평등 조약입니다. 이를 통해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으며, 국권 침탈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고종 황제의 명시적인 승인 없이 강압적으로 체결되었으며, 대한제국 내부의 거센 반발과 국제적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구조적 원인 – 을사조약이 체결된 배경
1. 일본의 제국주의 확대와 대한제국 압박
일본은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1868년) 이후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군사력을 강화했습니다. 이에 따라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이는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에서 본격화되었습니다.
- 청일전쟁(1894~1895): 일본이 청나라를 물리치고 조선에서의 우위를 점하게 됨.
- 러일전쟁(1904~1905): 일본이 러시아를 격파하고 한반도에서의 지배권을 강화함.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은 대한제국을 정치·경제적으로 종속시키려는 야욕을 드러냈으며, 1904년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2. 대한제국의 내부적 위기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었지만, 국가 운영은 혼란스러웠습니다.
- 재정난 심화: 과도한 차관 도입과 경제 착취로 인해 국가 재정이 악화됨.
- 정부의 무능과 부패: 황실과 정부 고위층의 부패로 국정 운영이 어려워짐.
- 민중의 불만 고조: 농민과 지식인층이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며 반외세 운동을 전개함.
3. 국제 정세와 일본의 외교적 공세
을사조약 체결 당시 국제 사회는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묵인하는 분위기였습니다.
- 영국: 1902년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일본의 동아시아 진출을 간접적으로 지원.
- 미국: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필리핀에서의 미국 지배를 인정받는 대가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승인.
- 러시아: 러일전쟁 패배 후 일본과 **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을 체결하며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상실.
이처럼 국제 사회는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를 암묵적으로 승인하였으며, 대한제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습니다.
⚡ 직접적 계기 – 을사조약의 체결 과정
1. 일본의 강압적 조약 추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외교권을 박탈하려 했습니다. 일본은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를 특사로 보내 대한제국 정부를 협박하며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했습니다.
2. 조약 체결 강요와 대한제국의 저항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협박하여 조약 체결을 시도했습니다.
- 고종 황제: 조약 체결을 거부하며 끝까지 서명하지 않음.
- 대신들: 강압 속에서 찬반으로 나뉘었음.
- 찬성: 이완용, 박제순, 권중현, 이근택, 이지용 (이른바 ‘을사오적’)
- 반대: 한규설, 이상설, 민영환 등은 끝까지 반대하며 자결 또는 항거함.
이처럼 대한제국 내부에서는 강한 저항이 있었지만, 일본군의 무력 시위와 협박으로 인해 조약은 강행되었습니다.
📅 타임라인 – 을사조약 체결 과정
-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일본, 대한제국을 전쟁에 이용하기 위해 압박 강화.
-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체결 → 일본이 대한제국의 군사적 이용 가능.
-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 체결 → 일본이 재정·외교 고문을 파견하여 내정 간섭 시작.
- 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 체결 →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한반도 지배권 인정받음.
-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대한제국 대신들을 협박하여 을사조약 강행.
- 1905년 11월 18일: 조약이 공포되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넘어감.
🔄 영향과 의의
A. 단기적 변화 – 대한제국의 국권 상실 가속화
-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하여 국제적으로 고립됨.
-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어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됨.
- 고종 황제는 국제 사회에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함.
- 을사조약에 반발하여 의병 운동과 자결 순국 운동이 확대됨.
B. 장기적 영향 – 국권 침탈과 독립운동
-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고종이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 했으나 실패.
- 1907년 고종 강제 퇴위: 일본은 대한제국의 황제를 교체하며 통제 강화.
-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을사조약을 시작으로 5년 후 대한제국은 일본에 완전히 병합됨.
- 독립운동의 본격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1909년) 등 항일투쟁이 확산됨.
📊 결론 – 을사조약의 역사적 의미
을사조약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었으며, 이후 한일병합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을사조약에 대한 저항은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었고, 이후 3·1운동(1919)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919)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을사조약은 한민족에게 치욕적인 역사이지만, 동시에 독립을 향한 저항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주권과 외교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